까마귀 소년은 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운명이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진로를 바꿔가며 어느 특정한 지점에 집중되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니가 그 폭풍을 피하려고 하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 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푹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게.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오시마: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먼 옛날의 신화 세계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었어. 남자남자, 남자여자, 여자여자가 등이 맛붙어 있는 세 종류. 하느님이 반쪽씩 갈라놓자 사람들은 원래 한 몸으로 붙어 있던 반족을 찾아 우왕좌왕하면서 인생을 보내게 되었데.
<유형지에서>: 카프카는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복잡한 기계에 관한 것을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카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의 세부에 대한 설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표현했지요.
나는 카프카의 소설에 대한 일반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 복잡하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처형 기계는 현실의 내 주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비유나 우화가 아니다.
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야.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어떤 종류의 불완전한을 지닌 작품은 불완전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소세키의 <고후>와 마찬가지로 슈베르트의 D장조 소나타에서는 인간이 영위하는 한계를 듣게 되지.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지.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지.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아돌프 아이히만이 관료로서 유태인 최종해결을 가장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그런 건 잠자코 마음대로 상상하면 되잖아? 일일이 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네 상상을 나는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말야.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는가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이다.
제19장 - 속이 텅 빈 사람들의 자기 증명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런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을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다만 내가 짜증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무감감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결국 사에키 상의 연인을 죽인 것도 그런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관계성 - 어울림 : 후렴 부분에 이상한 코드가 두 개 들장한다. <해변의 카프카>의 음악에 담겨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재능과 욕심이 없는 마음의, 솔직하고 다정한 '어울림'인 것이다.
그래. 넌 무척 기묘한 장소에 세워져 있지. 그리고 거기에는 출구가 없어. 너는 시간의 미궁 속에 빠져버린 거다. 가장 큰 문제는, 네가 그 시간의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그렇지?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 앙리베르그송
자기의식 - 인간은 단순히 자기와 객체를 따로따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중간에서 자기와 객체를 연결해 객체에 자기를 비춤으로써, 행위적으로 자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헤겔
오시마: 이따금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32장 - 사람은 누구나 속 빠진 빈 껍데기
오시마: 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원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지. 모든 것은 환상이야. 만약 정말로 자유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무척 난감해할걸.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자유를 좋아한다는 거지. 장자크 루소는 인류가 울타리를 만들었을 때 문명이 태어났다고 정의했지. 그야말로 예리한 관찰력이라고 할 수 있어. 그의 말대로 모든 문명은 울타리로 구획된 부자유의 산물이야. 17세기까지 울타리가 없는 문명을 유지한 오스크레일리아 대륙의 아보리지니. 그들 자유인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돌아다니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깊은 메타포였지. 영국인이 건너와서 가축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존재로서 황야로 추방되었지. 결국 이 세계에서는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인간이 유효하게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것을 부정하면 넌 황야로 추방당하게 돼.
하이든은 어떤 의미에서는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그가 자아를 복종의 옷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짓밟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흐나 모차르트에 비해 하이든을 가볍게 봅니다. 그러나 마음을 집중해서 주의 깊게 듣는다면, 근대적 자아에 대한 숨겨진 동경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하지만, 소년과 같은 유연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리고 중심을 향해 가까이 가려는 구심적이면서도 집요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깊은 숲 속에서 외톨이가 되자, 나라는 인간이 무척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고독하고 어두컴컴한 미궁 속에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미궁의 막다른 한계점에서 내 중심을 응시한다. 귓속에서 존 콜트레인은 아직도 미궁적인 독주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생각을 바꾸어 배낭 안에서 사냥용 칼을 꺼내 주머니에 넣는다. 필요하면, 그것으로 손목의 혈관을 째고 내 안에 있는 모든 피를 땅바닥에 흘려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장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실크해트 사나이: 나는 고양이들의 영혼을 모아서 피리를 만들었네. 산 채로 찢긴 고양이들의 영혼이 모여서 이 피리가 되었지. 이것은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정이라든가 미움이라든가, 그런 세속적인 기준을 넘은 피리일세. 이걸 만드는 일이 오랫동안 나의 천직이었지,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네. 나는 편견이 없는 인간이지. 그래서 하나의 시스템이 될 수가 있다네.
오시마: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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