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박홍규 지음/미토
엄밀히 이야기하면 전자 쪽일 것이다. 주인공은 이방인이고 소외되며 늘 주변과 사투하고 결말은 허탈하기에...
하지만 그러한 고독한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해석이나 실존적 방향을 의미한다는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처한 부조리는 추상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부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위주의적, 혹은 차별,배타주의적인 색채를 너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부조리인 것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죄와 벌의 간격에 시선을 보낸 러시아 문호들이나
부조리에 처한 인간을 그린 카뮈 등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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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권력과 싸우다
박홍규 교수의 시각은 늘 내 맘에 든다. 이 아저씨 정말 만나보고 싶고, 이 아저씨가 가르쳐 주는 법학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시각이나 니체에 대한 시각이나 늘, 이 아저씨 만의 색깔을 만나면서 나만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어쨌든 이 아저씨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권력에 대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관점에 관심이 있는 나도 잠깐 카프카를 이 아저씨처럼 읽었지만,
약간 다른 해석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권력집중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대리인 문제를 시대의 과제로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어쨌든 그나마 비슷한 해석을 만났다는 기쁨은 정말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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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카프카, 거꾸로 읽기
내가 카프카를 친구로 여김은 내가 카프카처럼 법을 공부한 탓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카프카의 대부분 작품이 법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문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점이기도 한데 이는
카프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카프카는 1901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24년 죽기 전가지 2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법과 관련되었고,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 간 <산업재해보험공단>의 성실한 관리로 살았다.
나는 이 점이 카프카 작품의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관리로서 관료사회가 가진 병폐를 매일 뼈저리게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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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개새끼를 내가 읽다니!
카프카전집 제4권 <실종자> 해설에서 역자는 1960년대 서울 고서점가에서 나돌던 카프카 소설의 뒷면에서
"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개새끼를 내가 읽다니!"라는 낙서를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카프카 작품이 끝없이 출판된 것은 다른 작가에 비해 특이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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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평생 몇 사람하고만 교제했고, 원고는 출판사가 의뢰를 해야 보냈다.
카프카는 소위 전업작가가 아니었고 글은 그야말로 밤에만 끄적거렸다.
카프카는 촌놈이었고 무명이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30년이 지나서였다.
카프카가 평생을 산 체코의 언어로 최초의 번역이 나온 것은 1957년이었다.
한국에서 카프카 작품이 번역되는 시기와 거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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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프라하.
유럽은 끝없는 전쟁의 역사를 갖는 대륙이다. 프라하도 끝없이 그런 전장의 무대가 되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나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는 탓으로 과거는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프라하는 오랫동안 보헤미아 지방을 지배한 왕국들의 수도였고,
현재 체코공화국의 수도인 그곳은 천년의 고도이다.
유럽 전체로 보면 프라하는 유럽의 한가운데 이기도 하다.
10세기 무렵부터 지금 슬로바키아인 지역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지금의 체코 지역에 있던 보헤미아 왕국도 1526년부터 392년간
합스부르크 왕조의 식민지가 되었다.
카프카가 태어난 19세기말 프라하는 슬라브족인 체코인을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다스리는 식민지와 같았다.
1880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그곳 인구는 약 22만 명이었고,
카프카가 죽을 무렵은 두 배에 이르렀다.
그곳 주민의 대다수는 체코인이었고, 독일인은 점차 감소하여
최초의 언어 조사가 실시된 1880년에는 15.5%, 1889년에는 13.6%
1910년이 되면서 45만명 가운데 독일어 사용 인구가
7.3% 정도인 3만 2천 명으로 줄었다.
국적이 없는 유태인은 체코인 또는 독일인 어느 하나에 편입되었다.
유태인 수는 독일인보다 조금 적은 2만 5천 명이었다.
독일인들을 싫어하는 체코인들의 증오감때문에 가끔씩
격렬한 소요가 발생하는 곳에서 유태인은
독일문화권에 속한 민족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초까지 유태인들은 관계와 학계에 진출하지 못했고
주변적인 전문인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점에서 본다면 관리 조직의 관료 정점까지 오른 카프카는 매우 예외적인 존재였다.
18세기까지 유태인은 게토라고 불린 유태인 폐쇄사회 속에 갇혀 살았다.
그런 유태인들에게 1782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관용령'은
유태인과 비유태인 사이의 현실적, 법적 장벽을 허무는 다이나마이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평등도 그 후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관용령' 자체가 유태인에게 자유를 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의 참된 의도는 유태인을 동화시키는 것, 즉 유태인들의 고유한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유산을 폐기시켜 유태인을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난 직후인 1791년 프랑스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정책이 변화한다.
당시 과격한 민족투쟁으로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국가들의 존속이 위협받자
유태인 세력을 수면으로 띄운 것?
보불전쟁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함에 따라 독일 전역에 확대.
그후 유태인은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급속하게 상류사회에 진출해
1900년에 와서 사업가, 의사, 변호사, 교수의 90%를 독일계 유태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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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태주의의 뿌리는 깊다. 카프카 시대에는 유럽인들의 빈곤, 절망, 환멸이
조직적으로 유태인 증오에 박차를 가했다.
1899년 동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힐스너Leopold Hilsner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도 1883년 사건처럼 시골길에서 체코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소녀는 유태인에 의해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고,
대중신문에 의해 열 일곱 살의 유태인 힐스너가 범인으로 몰렸음,
유태인 공동체가 살인을 교사했다는 등의 보도까지 이어졌다.
재판에서 힐스너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 마사리크 Thomas Masaryk (1850-1937) 초대 대통령, 국부-- 이 때 프라하 체코 대학의 철학교수
가 법적인 문제점, 사실의 은폐, 법원의 편견 등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심을 요구하는 글을 발표했다.
드레퓌스 사건 때 졸라 Emile Zola (1840-1902)가 쓴
<나는 고발한다>를 연상시키는 그 글은 체코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학생 데모대는 마사리크의 해고를 요구했고, 대학은 마사리크의 강의를 중지시키고
마사리크의 저서를 금서로 정했다.
빈의 그리스 르네상스
그리스 문화는 유럽에서 새로운 문화의 계기로 끝없이 재흥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만이 아니라,
근대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한 바이마르 고전문화도
그리스 문화 르네상스의 또 다른 보기였다. (카프카는 실러에 대해서 그다지 호감 X)
제우스와 아폴로를 중심으로 한 올림프스 신들의 명랑하고 청순한 그리스 신화체계가 붕괴,
호머 이전의 디오니소스를 중심으로 한 야성적인 신들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경향
그러나 당시 빈 지식인들에게는 고전으로 기울어져야 했을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1806년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영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간 분쟁
'현대의 아테네'를 자처한 빈의 지식인들에게는 복잡한 시대의 도피처가 필요했다.
또한 이웃 나라인 신흥 군사 산업 국가 프로이센에 대한 강렬한 대항의식은
칸트와 헤겔의 관념론 철학과 프로테스탄트 우위의 교육체제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대신 역사적 비판주의와 실증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시대정신의 기폭제가 된 것은 문헌학이었다.
김나지움의 졸업시험은 그리스어, 라틴어 및 독일어의 상호 번역이었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오이디푸스는 당시 연극으로도 자주 상연되었고 빈시민들에 일상적인 소재여서
프로이트가 그 말을 섰을 때 시민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예컨대 화가 클림트가 작업복으로 입은 옷이 바로 그리스 풍이었다.
그리고 여가 즐기기, 유연한 산책, 세속을 벗어난 초연적인 마음 상태 등의
사회 도피적인 생활 태도는 바로 그리스인을 모방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방랑 == 빈 사람들의 보헤미안적 주거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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