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문학사상사 |
제11장 -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와타나베->레이코: 나는 나오코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도리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자꾸자꾸 저 끝까지 떠밀려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몹시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왜 이런 미궁과 같은 곳에 내동댕이쳐졌는지 나로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레이코->와타나베: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인 모두를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 나갈 순 없어. 안 그래? 인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 그런 식을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온 세계에서 너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됐건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거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이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제1장 - 18년 전 아련한 추억 속의 나오코
나오코는 내게 들판에 있는 우물 이야길 했다.
와타나베: 너와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우물에 빠지지 않을 거야.
나오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안 될 일이니까...
기억...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게 아닌가...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건,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에...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잊지말아 달라는 그녀를 생각하면 한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테니스와 농구를 하고 있어. 농구 팀은 환자(환자라는 말은 싫지만 어쩔 수 없지)와 스태프를 섞어서 구성해. 하지만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나는 누가 환자이고 누가 스태프인지 갈수록 알쏭달쏭해 지는 것 같아. 이건 어쩐지 이상한 일이야. 이상한 일이란, 게임을 하면서 주위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일그러져 보이는 거야. 어느 날 담당 의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고 했어. 그는 우리들이 이곳, 정신병원에 와 있는 건, 그 삐뚤어 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지. 우리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거야. 각기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 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 들면 다른데가 이상해 진다는 거야. 물론 이건 지극히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려는 뜻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 것도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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