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31, 2010

가볍게 읽는 장미의 이름, 카르티에 라탱

 

 최고다. 간만에 물건을 발견했다.

요즘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언어영역 교재로 추천될 만한 책이다.

사토 겐이치가 쓴 책이라는데...

카르티에 라탱카르티에 라탱 - 10점
사토 겐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문학동네

 중세를 배경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교될 수 있다.

이건 너무나 쉽다. 사실 에코씨 것과 비교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가벼워 흘러가 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더 가까이 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종교개혁 직전이라는 시대 상황에

개혁적 인물들이 파리에서 알고 지낸다는 설을 취하여

역사에 대한 흥미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앞부분에서는 CSI 과학수사대 식으로 에피소드별 추리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크게 짜임새 있지 않고 단편적이다 보니 약간 부족한 감이 있다.

당시 시대상황(가톨릭의 부패 등)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뭐 순식간에 중반부로 넘어갈 수 있다.

중반부에서는 16세기 파리의 풍속들로 흥미를 올리며

이단에 대한 논쟁으로 우리를 이끈다.

루터 칼뱅이 이단으로 묘사되는 것을 읽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관용(똘레랑스)를 배우는 기회가 된다.

종교적 논쟁을 통해 인간이란? 배움이란? 에 대한 질문을 유발하다가

마지막에는 긴 에피소드로 나름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들고

사랑이란? 에 대한 질문도 유발한다.


 

 파리는 센 강 우안과 좌안으로 나뉘어 있다. 우안이 활기로 가득찬 상공업의 거리라면 좌안은 에스프리가 넘치는 학문의 거리이다. 지혜의 전당, 파리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학생들은 강가에서 시끄럽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은 내 귀가 나빠서도 아니고 머리가 나빠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때때로 라틴어로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대학가가 '카르티에 라탱(라틴어 구역)'이라고 불리는 것은 교사나 학생들이 학문 용어인 라틴어로 시끄럽게 논쟁하는 데서 유래한다.

 역시 좋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후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골목길을 달리는 수도복 차림의 남자, 다음은 공강시간이라며 노점에서 작은 빵을 사는 속인, 저기에서 유명 교수의 강의록을 파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여기에서는 무명 교수의 청강생을 모집하는 자가 있다.

 카르티에 라탱은 위험한 거리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들이 떼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누리며 매일매일을 재미있게 보내자는 괘씸한 놈들이다.

 탁발수도사. 옛부터 읽고 쓰는 것은 성직자의 일이었으며 학문 중에서도 최고의 학문인 신학은 지금도 수도사들의 전유물이다. 아무리 여자를 품어도 결코 책임지지 않는 것은, 수도사는 독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카르티에 라탱의 남자들은 정말로 질이 나빴다.

 중앙의 반들반들한 돌계단에 발을 올려놓기가 무섭게 교성이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순식간에 그쳤다. 그 대신 아플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나를 쫓아왔다. 성당 안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는 화장품 냄새가 풍겨왔다.

 성당 안의 성가대석에서는 길드가 인정하는 정식 유곽에 속해 있지 않는 '베이콘'이라 불리는 여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군. 성가대석이라면 상품을 잘 보이게 진열할 수 있으니까! 아니지, 성당 안에서, 그것도 성가대석에서 이 무슨 모독인가. 그러나 그런 여자들을 내몰기는커녕 성당 참사위원 중에는 장소 제공비를 받는 자까지 있다고 하니 교회의 부패도 이젠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루터는 불손하게도 '에반젤리즘(복음주의)'-비블리즘(성서주의)을 주장하고 있지"

  성직자의 독단적인 설교, 멋대로 해석한 교리, 의미도 없이 만든 의례 등 사이비 인습에 얽매이기보다는 신의 말씀이 들어 있는 성서를 읽자고 주장하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 성서가 잘못투성이라면 말짱 도루묵이지.

 독일의 루터는 이단이지. 몽테규의 장 칼뱅도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어.

 지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어째서 생각하는 것일까? 욕망에 이길 수 없다면 인간은 왜 짐승처럼 살면 안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소용없다면 인간이 사고하고 지성을 동경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에세 에스트 데우스 (존재는 신이다).

존재는 신의 본질이요, 신 그 자체이다?

신이 없으면 인간의 모든 것이 용서된다. 신이 없으면 모든 영혼은 짐승과 같아진다. 모든 것이 용서되는 피조물에게 빛나는 진리인 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

사람이 지성을 통해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신은 존재한다.

그런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인간 신앙의 본질이 아니던가?

지성의 부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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