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터 란다.
그는 독일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다. 교양학부를 마치고 문학 학사와 석사를 거쳐 법률 공부를 하던 중 수도원으로 진로를 변경하였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 걸음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갔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덕분에 빠르게 보급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성직자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성서'만'을 권위의 근거로 보았다.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신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단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파문 당하였다.
칼뱅이다. 루터보다는 36년 정도 늦은 1509년에 태어났다.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하다가 법률 공부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옮겨가지 못하였다.
이단 박해를 피해 다녔고 프랑스와 가까우면서 박해가 없는 제네바가 주무대가 되었다.
1535년에 완성된 기독교 강요가 유명한 저작이다.
그의 예정설은 도시 상공 시민층이 근면, 절약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장려하여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그의 실천(제네바 아카데미 등)들을 통해 전 유럽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루터의 비판적 접근을 발달시키고 실천으로 연결시켰으며 전 유럽으로 전파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개신교나 로욜라의 초기 예수회나 이단 혐의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그들이 인정받은 이후에 관용(똘레랑스)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는 군대 신참 때 받은만큼 고참이 되어 돌려주는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짓’이라고 선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루터가 몇 년 후에는, 재세례파 사상에 물든 독일인과 네덜란드인들을 사악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증오에 빠져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세르베투스가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서 그가 쓴 책들과 함께 불타 사라졌던 장면을 보자. 미리 목을 졸라 죽이거나 마취를 한 뒤 화형을 집행함으로써 고통을 줄여주는 방식도 있었건만, 세르베투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생살이 타는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다. 이 극악한 형벌의 이유는 오직 하나, 칼뱅과 다른 성서 해석을 책으로 낸 행위 뿐이었다. 제네바를 사실상 장악한 칼뱅은 검열과 탄압으로 지식인들의 입을 봉쇄했고, 거리의 사소한 주먹다툼을 난동으로 몰아 반대파를 붙잡아 고문하고 처형했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지켜본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고 탄식했다.출처: 선샤인뉴스 :: 루터․칼뱅의 종교개혁
그가 제네바시를 장악하고 성서정치(Bibliokratie)를 펴면서 많은 무리를 낳았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던 바다. 그러나 칼뱅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비열한 인물인지에 대한 진면목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는 가톨릭과의 싸움을 빌미로 제네바시 전체를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이 관철되는 파시즘적 광기로 채웠던 사람이었다. 그의 신정 통치 처음 5년 동안에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차서 간수장이 시 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을까. 이것만 봐도 종교개혁을 내세운 그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 칼뱅의 광기에 맞선 카스텔리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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